물길 따라 내려가다 : 경항대운하
공신교(拱宸橋) 메인 아치를 수호하는 네 공복(蚣蝮)은 중국 신화 속 용의 아들 로, 긴장감이 서려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이러한 석물의 기능은 경항 대운하를 통해 항저우로 들어오는 배가 통과할 때 다리에 부딪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것인데, 이러한 기능을 고려하면 이런 긴장어린 모습은 그야말로 제격이다. 이 공복 조각상은 수백 년 동안 항저우가 중국에서 무역 거래의 출발점이자 종착지로서 위대한 역할을 수행하는 것을 쭉 지켜봐 온 산 증인이나 다름없다.
대운하는 한때 세계 경제의 심장으로, 베이징에서 저장성까지 근 1,800km나 이어져서, 1,400여년 전에 남방과 북방의 교류와 융합에 촉매역할을 하였다. 대운하가 통하는 곳이면 덩달아 경제적 번영과 교류도 빈번해졌으며 항저우는 그런 대운하의 핵심적 중추 도시였다.
대운하는 항저우를 완전히 다른 세상으로 만들었다. 서기 605년 전까지만 해도 항저우는 인구 15,000 명에 불과한 보잘것없는 소도시일 따름이었다. 그러나 610년에 경항대운하가 완공되자 항저우는 단박에 국제적 대도시로 급부상하였다. 8세기인 당(唐)나라 중기에 이르렀을 때 항저우에는 이미 3만여 개의 점포가 있었고 운하에 정박한 선박만 해도 수십km나 이어졌다.
현재 우린먼 부두에서 출발해 운하의 유람선을 타고 30분 정도 가면 공신교에 도착하는데, 그 연도에 전통적인 건축물과 현대식 고층빌딩이 나란히 함께 서 있는 광경을 볼 수가 있다.
대운하의 1단계 공사는 기원전 5세기 때 중국 북방에서 뚫기 시작했지만, 운하 의 남단 종착지인 항저우는 천 년이 지난 수(隋)나라에 이르러서야 최종적으로 개통되었다. 잔인하고 포학(暴虐)하기로 소문난 수양제(隋煬帝)는 수백만 명의 인력을 동원하여 불과 4년 만에 2,000km에 달하는 운하 공사를 완공하였는데, 기록에 의하면 그 가운데 40%의 노동자가 막중한 노동에 죽어 나갔다고 한다.
1280년대에 베니스에서 온 여행가 마르코 폴로는 항저우의 대운하를 구경하 고는 이렇게 글을 남겼다. “이곳에는 대규모의 운하가 있고, 광장으로 통하는 강변에는 어마어마한 석조 건축물이 들어서 있다. 광장마다 1주일에 3일 동안 장이 들어서는데, 4∼5만명이 드나들고 그들은 생활에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그 모든 물품을 가져와 교역을 한다.”
유람선의 종점인 공신교는 19세기 때는 주요한 여객선 부두였으며, 당시 청나라 정부는 중국의 현대화를 시도하였다. 그러나 주변의 옛 건물들은 여전히 잘 보존되어 있으며, 흰색으로 칠해진 좁은 골목길에는 전통 수공예의 제작 시연과 체험 및 전시를 하는 리빙전시관(Living Museum)을 찾아볼 수가 있는데, 부채나 우산, 칼, 가위 등 전통 수공예품과 그 아방가르드한 디스플레이가 참관자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2014년에 대운하가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선정된 것은 대운하가 중국의 발전 에 공헌한 바를 감안한 것임에 틀림이 없다. 천 년이 지난 지금도 이 대운하는 저장과 장쑤, 산둥을 잇는 화물을 운송하는 항로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대운하를 따라 제대로 유람하고자 한다면 샤오허즈제(小河直街)를 가보는 것도 괜찮은 선택이다. 이곳은 당송(唐宋)시대에는 대운하와 여러 수로가 합류하는 물자의 집산지로 교외에 속했지만, 20세기에는 발달된 상업 중심지로 탈바꿈 하였다.
오늘날 샤오허즈제는 여전히 20세기 초반 분위기를 풍기는 ‘원주민’가옥들이 자리하고 있다. 그곳에는 대장간과 방앗간이 있고 건물들의 검푸른 강남식 기와가 온 강변을 수놓고 있다. 길가의 아무 카페에 앉아 그 찬란했던 전통 문화를 회상하며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노라면 그 정취가 제법 쏠쏠하다.